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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에 머무르는 움직임과 흐름: 김효준의 회화에서(at/from) 흐르고 움직이는 것

 

콘노 유키

 

 

어떻게 보면 조각과 회화의 차이는 대상이 독립적이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배경을 시각적으로 가지느냐에 따른 차이이다. 회화 작품을 볼 때, 그려진 것들 안에는 대상이 있고 뒤로 물러선 배경이 있다. 예컨대 사람이 풀밭에 서 있는 그림에서 배경은 풀밭, 하늘, 구름, 멀리 보이는 집이 되고,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공간의 중심 대상인 인물을 향한다. 회화와 대조적으로 조각의 배경은 조각에 담기지 못한다. 어떤 자리에 조각이 서 있을 때, 배경은 실제 공간이 된다. 회화와 조각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배경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바로 배경이라 할 수 있음은 시각적이고 가시적인 조건 아래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대상과 배경이 회화라는 하나의 평면에서 구분하기 힘들 때조차도, 조각은 여전히 배경을 가질 수 있다. 인물화와 달리 인물상의 경우, 그것은 어디에 놓이게 되어도 배경을 가질 수 있다. 장소를 옮겨 다닐 때마다 새로운 배경을 얻는 조각은 비시각적이고 비가시적인 조건 아래, 바꿔 말해 배경이라 할 수 없는=부를 수 없는 조건 아래, 역설적으로 배경을 언제든지 소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회화 작업에서 배경이 환영적이라고도 부르기 힘들다. 화면은 실제적으로도 환영적으로도 배경을 소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상이 그려진 곳 또한 애초에는 배경이었고, 풀밭이나 하늘은 인물 뒤에 물러섰지만, 한 화면 안에서 대상과 수평적인 관계를 지닌다. 같은 화면 위에 있다는 점에서 표현된 대상과 배경은 물리적인 위계가 없다—캔버스나 종이라는 지지체는 둘 다를 지지한다. 이 수평적 관계 때문에 화면 위에서 대상은 독립적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 배경의 간섭을 받기도 한다. 예컨대 대상과 배경의 구분이 흐릿해지거나 서로 용해되어 한 화면 위에서 마치 화면 자체가 되었을 때, 회화가 소유하는 물성으로 인해 대상은 배경에 에워싸이고 파묻힌다. 주위에 퍼져 있는 배경이 대상에 간섭할 때, 배경은 물성뿐만 아니라 배경이라는 성격, 즉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날씨와 같은 흐름을 부각한다. 환영이자 물성을 가진 배경은 윌리엄 터너의 회화에 잘 드러나 있다. <Snow Storm>(1842)에서 배는 배경에 동화될 정도로 그 안—물성을 가진 물감의 층과 이것이 만들어 내는, 표현된 대기와 파도에 파묻힌다.

 

/// 이처럼 배경은 물성을 지닌 구체적인 것 즉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려진 대상과 배경의 환영을 떠받쳐 주는 바탕이다. 하지만 동시에, 물성에 국한되지 않고 너머로 장소와 장면을 펼치기도 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회화 작품은 현실이나 상상의 단편이고, 이 단편이 지니는—한때 지닌, 혹은 여전히 지니는 전체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을 보고 그곳을 떠올릴 때, 조각 작품이 놓일 때마다 그 장소를 배경 삼는 것 못지않게 자유롭게 출현시킬 수 있다. 김효준의 회화 작업에 관해서 쓴 글에서, 왜 조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회화로 오게 되었을까? 바로 작가의 관심은 대상과 배경 사이의 흐름과 움직임이기 때문이고,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소재인 조각상의 특성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띠오에서 열린 김효준의 개인전 <<The Orbit>>의 출품작을 보면, 주름과 흐름이 특징적이다. 여기서 주름과 흐름은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그려진 대상에 찾을 수 있는 시각적인 특징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로 대상 옆에서 그라데이션으로 밀려오는 배경과, 그로 인해 대상과 배경이 모호하게 만드는 움직임 또한 그렇다. 예컨대 <Front Double Biceps>(2023)에서 대상은 인체의 복부이다. 그런데 그 주위를 에워싸는 빛은 마치 인물의 자세를 받쳐 주는 것과도 같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편의 빛은 배경보다는 대상에 가까운,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윤곽과 무게를 가진다. 독립적으로 서 있는 인체 조각에서 내적으로 흐르던 힘은, 김효준의 회화에서 바깥과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그려진다고 할 수 있다.

 

<Front Double Biceps>에서 한 화면 안에서 흐르고 움직이는 힘을 찾아낼 수 있다면, 전시를 통해서도 작가는 움직임과 흐름을 부여한다. 예컨대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품 <Wig>(2023), <Mamison>(2023), <Fat>(2023)은 간격을 두고 기둥처럼 세로로 전시되어 있다. 제목에 나타나듯이 각각 원래 재현 대상이 다른 회화 세 작품이 하나의 기둥처럼 보이게 될 때, 간소화된 색과 형태는 처음의 표현 대상에서 기둥이라는 다른 대상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세 회화에서 기둥이라는 특정 소재가 자리하게 된다면, 전시장 벽면에 걸린 작품들은 작품 주변과 사이에 있는 여백에 자유롭게 이미지를 그려나가도록 한다. <Two Headed Study>(2023)와 <Head Study>(2023)가 걸린 벽에는 포효의 울려퍼짐과도 같이 화면의 그라데이션이 전시장의 하얀 벽에 퍼져 간다. 석고나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 그리스 시대의 하얀 인체 조각, 그 멈춘 자세의 감정 표현 속에 생기를 들여다본 레싱의 주장을 경유하여, 김효준의 회화 작업은 하얀 벽면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형태가 아직 보이지 않는, 어쩌면 조각에서 어디서나 놓을 수 있는 비시각적이고 비가시적인 배경에, 회화 속 움직임은 상상으로 이미지를 그려나가도록 해 준다.

 

점토로 만든 <천혜향>(2022)이 전시장 가운데에서 흐름을 만든다. 다시 생각해 보니, 흐름이란 어딘가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파도의 힘이 바닷가를 굴곡지게 하듯이, 그 파도가 어딘가에서 힘을 받고 밀려왔듯이. 말하자면 그 정지된 모습에 내외적으로 궤도를 담는 것이다. 그려진 배경이 대상을 침투하는 화면에서 역동적으로 펼치는 과정뿐만 아니라 김효준의 작품에서 우리는 배경에 머무르는 움직임과 흐름을 보게 된다. 회화 작업의 표면은 조각 못지않게 정지 상태에 움직임을 담는다. 인체 조각의 표현에서 움직임과 흐름은 그 대상의 살에 담긴다. 근육도 생명력도 없는 대리석 밑, 그 안쪽에는 인물의 힘을 표면으로써 드러내는=표현하고자 하는 긴장이 뻗어 있다. 이 긴장은 표면에 흐름을 담는 점에서 회화와 공통적이다. 어쩌면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인—이 물성과 환영을, 그림 속의 대상과 배경을 재편성하고 담는 흐름이 김효준의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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